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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엑스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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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69년부터 2004년까지 활동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팀으로, 몬트리올을 연고지로 했다. 1890년대에 시작된 몬트리올의 프로 야구 역사를 계승하여, 1968년 내셔널 리그(NL)의 확장 팀으로 창단되었다. 엑스포스는 1969년 자리 공원에서 첫 경기를 치렀으며, 1977년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팀은 1981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으나, 1994년 선수 파업 이후 핵심 선수들의 이탈과 재정난을 겪으며 쇠퇴했다. 결국 2004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워싱턴 D.C.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워싱턴 내셔널스가 되었다. 엑스포스는 블라디미르 게레로,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비롯한 여러 명의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으며, 게리 카터, 앤드레 도슨, 팀 레인스 등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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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엑스포스
기본 정보
정식 명칭몬트리올 엑스포스
프랑스어 명칭레 엑스포 드 몽레알
창단1969년
해체2004년 (워싱턴 D.C.로 이전, 워싱턴 내셔널스로 변경)
리그내셔널 리그 (1969–2004) 동부 지구 (1969–2004)
영구 결번8 | 10 | 10 | 30 | 42
팀 색상빨간색, 흰색, 파란색
별칭더 스포스, 노자무르
홈구장재리 파크 스타디움 (1969–1976) 올림픽 스타디움 (1977–2004) 히람 비손 스타디움 (산후안, 푸에르토리코) (2003–2004)
리그 우승 횟수 유형내셔널 리그 우승
지구 우승 횟수 유형NL 동부 지구
지구 우승 횟수1 (1981년)
마스코트수키 (1978년) 유피! (1979–2004)30 years ago, Tommy Lasorda got a mascot ejected for napping on his dugout
구단주찰스 브론프먼 (1969–1990)
클로드 브로슈 (1991–2001)
제프리 로리아 (2001–200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2002–2004)
감독진 마우치 (1969–1975)
칼 쿠엘 (1976)
찰리 폭스 (1976)
딕 윌리엄스 (1977–1981)
짐 패닝 (1981–1982, 1984)
빌 버든 (1983–1984)
벅 로저스 (1985–1991)
톰 러늘스 (1991–1992)
펠리페 알루 (1992–2001)
제프 토보그 (2001)
프랭크 로빈슨 (2002–2004)Franchise Managers
단장짐 패닝 (1969–1976)
찰리 폭스 (1976–1978)
존 맥헤일 (1978–1984)
머레이 쿡 (1984–1987)
빌 스톤맨 (1987–1988)
데이브 돔브로스키 (1988–1991)
댄 듀켓 (1991–1994)
케빈 멀론 (1994–1995)
짐 비티 (1995–2001)
래리 베인페스트 (2001–2002)
오마르 미나야 (2002–2004)Franchise General Managers
웹사이트montreal.expos.mlb.com (2004년 보관)
총 승패2,753승 2,943패 4무
추가 정보
관련 문서1981년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즌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200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이전 위치MLB selects D.C. for Expos
관련 항목몬트리올 엑스포스
프랑스어 명칭Les Expos de Montréal

2. 역사

몬트리올의 프로 야구 역사는 1890년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팀들이 잠시 활동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7년에는 이스턴 리그의 몬트리올 로열스가 창단되어 20시즌 동안 활동했다.[6] 1928년에 재창단된 로열스는 1939년 브루클린 다저스에 인수되어 트리플-A 협력 구단 중 하나가 되었고,[7] 1946년에는 재키 로빈슨이 로열스에 합류하여 팀을 주니어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9] 1960년 시즌 후, 로열스는 매각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10]

로열스가 사라진 직후, 몬트리올 시장 장 드뢰포는 메이저 리그 야구(MLB) 팀 유치 운동을 시작했다.[10] 1968년 5월 27일, 내셔널 리그 회장 워렌 자일스는 샌디에이고와 몬트리올에 각각 1000만달러의 비용으로 확장 팀을 추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4] 금융가 장-루이 르베스크와 시그램 상속자 찰스 브론프만이 이끄는 소유주 그룹이 구성되었고, 브론프만이 회장직을 이어받았다.[15] 팀 이름으로는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이미 사용하고 있던 "로열스" 대신, 엑스포 67 세계 박람회를 기념하여 프랑스어와 영어에서 같은 철자를 가진 "엑스포스"라는 이름을 선택했다.[21]

1969년 자리 공원에서 열린 경기


진 모치를 초대 감독으로 맞이한 엑스포스는 1969년 4월 8일, 뉴욕 메츠를 시아 스타디움에서 11-10으로 승리하며 데뷔전을 치렀다.[23] 4월 14일에는 자리 공원 스타디움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8-7로 승리하며 첫 홈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24] 4월 17일에는 빌 스토니먼이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엑스포스 역사상 첫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25] 그러나 엑스포스는 창단 시즌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함께 내셔널 리그 최악의 성적인 52승 110패를 기록했다.[27]

팀의 초기 스타는 러스티 스타브였다. 그는 1970년 30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르 그랑 오랑주'(Le Grand Orange)라는 별명을 얻었다.[29] 1970년에는 투수 칼 모튼이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내셔널리그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31] 빌 스토니먼은 1972년 10월 2일 몬트리올에서 뉴욕 메츠를 상대로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32] 팀은 첫 10년 동안 한 번도 승률 5할을 넘지 못했고, 관중 수는 1974년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1976년에는 시즌 동안 60만 명을 약간 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29]

1977년 시즌, 엑스포스는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37] 1979년에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승률 5할을 넘는 시즌(95승 65패)을 보냈고,[28] 처음으로 200만 명의 관중을 기록했다.[45] 1980년에도 엑스포스는 디비전 선두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단 1경기 차로 뒤졌다.[46]

1981년 찰리 리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세 번째 노히터를 기록했다.[48] 그해 엑스포스는 1981년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필리스를 꺾고 1981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5차전에서 9회 초 릭 먼데이에게 결승 홈런을 허용하며 패했다. 이 경기는 "블루 먼데이"로 알려지게 되었다.[58]

1982년 7월 13일 몬트리올에서 열린 1982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에서 엑스포스 선수 4명(게리 카터, 안드레 도슨, 팀 레인스, 스티브 로저스)이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60] 그러나 1982년 엑스포스는 86승으로 리그 3위에 그쳤고,[57] 1983년에도 82승 80패로 시즌을 마쳤다.[57] 1984년, 엑스포스는 피트 로즈(Pete Rose)와 1년 계약을 맺었지만,[66] 로즈는 몬트리올에서 95경기 동안 타율 .259, 무홈런으로 부진했고, 결국 원 소속팀인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되었다.[68] 몬트리올은 시즌을 패배 기록으로 마감했다.[57]

1986년 시즌 후, 안드레 도슨은 메이저리그 야구 담합(Major League Baseball collusion)의 영향으로 시카고 컵스와 1년 50만달러 계약을 체결했다.[73][74] 팀 레인스 또한 담합의 영향을 받았지만, 3년 500만달러 계약으로 엑스포스에 복귀했다.[75] 1989년, 엑스포스는 지구 우승을 위해 마크 랭스턴(Mark Langston)을 영입했지만, 랜디 존슨(Randy Johnson) 등 유망주들을 내주는 대가를 치렀다.[81][82] 엑스포스는 81승 81패로 지구 4위를 기록했고, 랭스턴은 자유 계약 선수로 팀을 떠났다.[83][84][85]

1990년 11월 29일, 클로드 브로슈(Claude Brochu)가 이끄는 그룹이 1억 달러에 팀을 인수했다.[91] 1991년 7월 26일, 마크 가드너(Mark Gardner)는 LA 다저스를 상대로 9이닝 노히트를 기록했지만 10회에 패했다.[96] 이틀 후, 데니스 마르티네즈(Dennis Martínez)는 같은 팀을 상대로 메이저 리그 역사상 13번째 완봉승을 달성했다.[97] 1991년 9월 13일, 올림픽 스타디움 구조물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엑스포스는 시즌 마지막 한 달 동안 홈 경기를 치를 수 없게 되었다.[100] 1992년에는 펠리페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메이저 리그 최초의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감독이 되었다.[104] 1993년, 엑스포스는 94승을 거두며 NL 동부 리그 2위를 기록했다.[101]

1994년 8월 12일, MLB 선수들의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되었을 때, 엑스포스는 74승 40패로 메이저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112] 파업 이후, 엑스포스는 핵심 선수들을 팔기 시작했다. 켄 힐, 존 웨털랜드, 마퀴스 그리솜이 트레이드되었고, 래리 워커는 자유 계약 선수로 팀을 떠났다.[118] 1995년 엑스포스는 내셔널 리그 동부지구 최하위를 기록했고, 평균 관중 수는 24,543명에서 18,189명으로 약 26% 감소했다.[122] 1996년에는 88승 74패로 2위를 차지했지만, 그 후 5시즌 동안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101]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997년 엑스포스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을 수상했지만,[126] 일주일 만에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127] 1999년, 제프리 로리아(Jeffrey Loria)가 엑스포스의 운영 책임자가 되었다.[138]

오마르 미나야(Omar Minaya)는 MLB 역사상 첫 번째 라틴 아메리카 출신 단장이었다.


2001년 11월 6일, MLB 구단주들은 28대 2로 리그 축소에 찬성표를 던졌고, 엑스포스와 미네소타 트윈스만 반대했다.[155] 그러나 미네소타에서 제기된 소송과 MLBPA의 이의 제기로 인해 두 팀 모두 구제되었다.[156] 그 직후 로리아는 엑스포스를 MLB에 매각하고 그 판매 대금을 사용하여 플로리다 말린스를 구입했다.[144] MLB는 전 애너하임 에인절스 사장 토니 타바레스(Tony Tavares)를 팀 사장으로, 메츠의 부단장 오마르 미나야(Omar Minaya)를 부사장 겸 단장 겸 프랜차이즈 운영 책임자로 임명했다.[160] MLB의 수석 징계 위원 프랭크 로빈슨(Frank Robinson)이 팀의 매니저로 임명되었다.

2002년 엑스포스는 83승 79패의 기록으로 1996년 이후 첫 승률 5할 이상 시즌을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에는 진출하지 못했다.[167] 2003년, 엑스포스는 81경기 중 22경기를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치렀다.[170] 9월 1일 MLB의 로스터가 확장되자, 셀리그는 엑스포스가 마이너 리그에서 추가 선수를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172] 팀은 다시 부진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73]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마지막 시즌은 2004년이었고, 다시 몬트리올과 산후안에서 나뉘어 치러졌다.[173] 2004년 9월 29일, 메이저 리그 야구는 프랜차이즈가 2005년 시즌에 워싱턴 D.C.로 이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 같은 날 밤, 팀은 몬트리올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175] 팀은 엑스포스로서 마지막 경기를 원정에서 치렀고, 1969년 프랜차이즈의 첫 경기에서 상대한 팀인 뉴욕 메츠와의 경기로 10월 3일에 끝났다.[176] 팀은 36년간의 역사를 2,753승 2,943패 4무의 기록으로 마감했다.[176]

2004년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엑스포스 경기 전에 촬영한 파노라마 사진.

2. 1. 창단 (1960-1968)

몬트리올의 프로 야구 역사는 1890년 팀들이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잠시 활동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두 번째 프로 팀 유치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이스턴 리그의 몬트리올 로열스가 1897년에 창단되어 20시즌 동안 활동했다.[6] 로열스는 1928년에 재창단되었고, 1939년 브루클린 다저스에 인수되어 트리플-A 협력 구단 중 하나가 되었다.[7] 1946년, 재키 로빈슨이 로열스에 합류하여 팀을 주니어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1년 후 야구의 인종 차별을 깨뜨렸다.[9] 1960년 시즌 후, 로열스는 매각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10]

로열스가 사라진 직후, 몬트리올 시장 장 드뢰포와 시 행정위원회 위원장 게리 스나이더는 메이저 리그 야구(MLB) 팀 유치 운동을 시작했다.[10] 1967년 겨울 회의에서 몬트리올은 리그 구단주들에게 입찰을 제출했다.[12] 월터 오말리가 NL 확장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점이 몬트리올의 입찰에 도움이 되었다.[13] 1968년 5월 27일, 내셔널 리그 회장 워렌 자일스는 샌디에이고와 몬트리올에 각각 1000만달러의 비용으로 확장 팀을 추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4]

프랜차이즈를 확보한 스나이더는 금융가 장-루이 르베스크와 시그램 상속자 찰스 브론프만이 이끄는 소유주 그룹을 구성했다. 이후 브론프만이 회장직을 이어받았다.[15] 새로운 그룹은 적어도 2년 동안 경기를 치를 적절한 시설을 찾는 문제에 직면했다.[16] 뤼시앵 솔니에는 드뢰포가 자체 권한으로 구장 건설 보장을 할 수 없다고 브론프만에게 말했다. 1968년, 시설에 대한 도시의 움직임 없이 지나가자 브론프만과 그의 그룹은 철수할 위협을 가했다.[17] 로열스의 홈구장이었던 델로리미에 스타디움은 주거 지역에 있어 2만 석 이상으로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임시 시설로도 거부되었다. 캐나다 풋볼 리그의 몬트리올 알루엣츠의 홈구장인 오토스타드는 확장 및 돔 설치 비용이 과다하고, 연방 정부 소유 시설에 필요한 개조 작업을 할 권한이 있는지조차 의문이 제기되어 제외되었다.[18] [20]

1968년 8월, NL 구단주들은 미해결된 구장 문제에 대해 우려했고, 워 메모리얼 스타디움이 있는 뉴욕주 버팔로에 프랜차이즈를 수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19] 드뢰포가 몬트리올 중심부에 위치한 자리 공원에 있는 3,000석 규모의 지역 구장을 3만 석 규모로 확장하여 엑스포스의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하겠다고 제안하자, 리그 회장 워렌 자일스는 몬트리올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얻었다. 비용은 100만캐나다 달러가 넘었다.[20]

팀 이름으로는 여러 가지 옵션이 고려되었다. "로열스"는 마이너 리그 로열스를 기리는 팬들에게 인기 있었지만, 이미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사용하고 있었다. "보야주어스"와 "내셔널스"도 고려된 이름 중 하나였다.[21] 팀은 최근에 끝난 엑스포 67 세계 박람회를 기념하여 프랑스어와 영어에서 같은 철자를 가진 "엑스포스"라는 이름을 선택했다.[21] 도시가 팀을 배정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엑스포스는 시즌을 시작하기 위해 경기장에 나섰다.[22]

2. 2. 자리 공원 시절 (1969-1976)



진 모치를 초대 감독으로 맞이한 엑스포스는 1969년 4월 8일, 뉴욕 메츠를 시아 스타디움에서 11-10으로 승리하며 데뷔전을 치렀다.[23] 4월 14일에는 첫 홈 경기이자 미국 외 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메이저리그 경기를 가졌는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자리 공원 스타디움에서 29,184명의 관중 앞에서 8-7로 승리했다.[24] 사흘 후인 4월 17일, 팀 역사상 9번째 경기에서 빌 스토니먼이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7-0으로 제압하며 엑스포스 역사상 첫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25] 초반의 활약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엑스포스는 창단 시즌 대부분을 고전했다.[26] 몬트리올은 신생팀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함께 내셔널 리그 최악의 성적인 52승 110패를 기록했다.[27] 다음 시즌에도 팀의 성적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 1970년 73승 89패, 1971년 71승 90패를 기록했다.[28]

팀의 최고 선수이자 초기 스타는 러스티 스타브였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엑스포스 창단 전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되었고,[26] 1970년 30개의 홈런으로 팀을 이끌었으며,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르 그랑 오랑주'(Le Grand Orange)라는 별명을 얻었다.[29] 스타브는 팀의 첫 3시즌 동안 몬트리올의 유일한 올스타전 대표였으며,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현지 팬들에게 사랑받았다.[30] 투수 클로드 레이몬드 또한 인기가 많았다. 그는 1972년 몬트리올에서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마쳤으며, 팀 최초의 프랑스계 캐나다 스타였다.[29] 1970년 18승 11패를 기록한 투수 칼 모튼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내셔널리그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31] 빌 스토니먼은 1972년 10월 2일 몬트리올에서 뉴욕 메츠를 7-0으로 이기면서 미국 이외 지역에서 치러진 첫 번째 노히트 노런을 포함해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32]

팀은 첫 10년 동안 한 번도 승률 5할을 넘지 못했고, 6개 팀으로 구성된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에서 8번이나 5위 또는 6위를 차지했다.[28] 팀 창단 초기의 열기가 식으면서 관중 수는 감소했다. 1973년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위한 도전을 펼치면서 잠시 회복되었지만, 1974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33] 1976년까지 관중 수는 시즌 동안 60만 명을 약간 넘는 수준으로 떨어져 창단 시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29]

엑스포스는 경기장 밖에서도 문제를 겪었다. 자리 공원은 최대 1971년까지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 경기장으로서의 부족한 점이 많았다. 관중석은 자연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엑스포스는 초반 여러 경기를 연기해야 했다. 또한, 태양이 1루수의 눈앞에 직접 비춰 경기 지연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정된 교체 구장인 올림픽 스타디움의 여러 차례의 지연과 예산 초과로 인해 엑스포스는 1976년까지 자리 공원에 머물러야 했다.[34]

분리주의 정당인 퀘벡당(PQ)이 1976년 퀘벡 선거에서 다수당 정부를 수립할 경우 가족과 시그램 회사를 퀘벡 외부로 이전할 것이라고 브론프먼이 격분한 연설을 한 후 팀의 미래는 불확실해졌다.[35] 퀘벡당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브론프먼과 엑스포스는 퀘벡에 남았다.[36]

2. 3. 올림픽 스타디움과 블루 먼데이 (1977-1981)

1977년 시즌, 엑스포스는 원래 계획보다 6년 늦게 새로운 야구장인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37] 1976-77년 오프시즌 동안 올림픽 스타디움 임대 계약이 지연되면서 엑스포스는 시즌 초반을 자리 공원에서 치러야 할 것처럼 보였다. 1976년 주 선거에서 퀘벡당(PQ)이 압승을 거둔 직후 팀은 협상을 중단했고, 엑스포스는 자리 공원에서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가정하에 1977년 시즌 티켓 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1977년 초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38] 몬트리올의 개막전에서 필라델피아에 7-2로 패배했으며 총 57,592명의 팬들이 경기를 관람했다.[39]

새로운 시설은 상당한 개선이었지만, 몬트리올의 혹독한 기후로 인한 날씨 문제는 1987년 스타디움 지붕이 설치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외야 펜스의 얇은 패딩과 20년 이상 사용된 최초의 인조 잔디로 인해 선수들은 부상 위험에 자주 노출되었고, 결국 이 야구장은 백색 코끼리로 여겨지게 되었다.[40] 1977년에는 75승, 1978년에는 76승을 거두었다.[28]

패배하는 시즌이 이어졌지만, 엑스포스는 가리 카터[41], 스티브 로저스, 앤드레 도슨, 팀 레인스를 중심으로 탄탄한 주전 선수들을 갖추었다.[29] 토니 페레스[42]와 같은 베테랑 선수들을 영입하여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로스터를 보강했다. 1977년 엑스포스는 딕 윌리엄스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윌리엄스는 젊은 선수 육성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1967년 젊은 보스턴 레드삭스팀을 아메리칸리그 페넌트로 이끌었고, 1972년과 1973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43] 1979년 몬트리올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승률 5할을 넘는 시즌을 보냈다. 7월 중순에는 NL 동부 리그에서 6.5경기 차로 선두를 달렸지만,[44] 결국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2경기 차로 뒤진 95승 65패를 기록하며 2위를 차지했다.[28] 몬트리올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200만 명의 관중을 기록했으며, 이는 5년 연속 내셔널리그 관중 순위 상위 4위에 랭크된 시작이었다.[45] 1980년에도 엑스포스는 디비전 선두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단 1경기 차로 뒤졌다.[46] 두 시즌 모두 엑스포스는 시즌 마지막 주말까지 디비전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지만 최종 월드 시리즈 우승팀에게 패했다.[47]

1981년 찰리 리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세 번째 노히터를 기록했다. 그는 1981년 5월 10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4-0으로 이겼다.[48] 엑스포스는 NL 동부 리그에서 30승 25패로 3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선수들의 파업으로 시즌이 두 달간 중단되었다. 파업이 끝날 무렵 713경기가 취소되어 재경기가 불가능했다. 메이저리그 야구는 분할 시즌 일정을 채택하여 엑스포스에게 하반기 시즌을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49] 파업 후 경기에서 5할 승률 근처를 맴돌자 구단은 윌리엄스를 해고하고 스카우팅 디렉터 짐 패닝을 감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팀은 계속해서 고전했고, 남은 15경기를 앞두고 19승 19패를 기록했다.[50] 몬트리올은 남은 경기에서 11승을 거두며 1위를 차지했고, 피츠버그 파이리츠보다 반 게임 앞서 프랜차이즈 최초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했다.[51][52] 테리 프랑코나가 데이브 킹맨이 친 마지막 아웃카운트인 플라이볼을 잡아 뉴욕 메츠와의 마지막 경기 5-4 승리를 확정 지었다.[51]

1981년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엑스포스는 전반기 우승팀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필리스와 맞붙었다. 몬트리올은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첫 두 경기를 3-1로 동일한 점수로 승리한 후 필라델피아에서 다음 두 경기를 패했다. 결정전인 5차전에서 몬트리올의 스티브 로저스는 스티브 칼턴과 투수전을 펼쳤다. 로저스는 완봉승을 거두며 몬트리올이 3-0으로 1981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5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맞대결에서 몬트리올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5전 3선승제 시리즈의 첫 두 경기를 나눠 가진 후 남은 세 경기를 위해 홈으로 돌아왔다. 몬트리올은 3차전에서 승리했지만, 4차전에서 패하며 시리즈를 마무리 짓는 데 실패하여 5차전이 열리게 되었다.[54] 비로 하루 연기된 5차전은 1981년 10월 19일 영하에 가까운 온도에서 열렸다.[55] 9회 초까지 1-1 동점이었던 경기에서 패닝은 그의 최고 선발 투수인 스티브 로저스를 불펜에서 투입하기로 결정했다.[56] 3-1 카운트에서 로저스는 싱킹 패스트볼을 던졌고, 몬데이는 이를 중앙 외야 담장 너머로 넘겨 결승 홈런을 기록하며 시리즈를 승리로 장식했다.[57] 이 순간과 경기는 엑스포스 팬들에게 "블루 먼데이"로 알려지게 되었다.[58]

2. 4. "80년대의 팀" (1982-1988)

1979년 시즌이 끝날 무렵, 엑스포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 육성 시스템 중 하나를 갖춘 팀으로 명성을 얻었다. 23세 미만의 선발 투수 4명을 포함하여 젊은 유망주들을 팀에 모아 "80년대의 팀"으로 불렸다.[57] 1982년 7월 13일 몬트리올에서 열린 1982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에서 엑스포스 팬들은 팀 선수 4명(게리 카터, 안드레 도슨, 팀 레인스, 스티브 로저스)을 선발 라인업에 투표했고, 알 올리버(Al Oliver)는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9년 이후 개최 도시 팀에서 4명의 선발 선수가 나온 것은 두 번째였다.[60] 내셔널 리그는 미국 외 지역에서 처음으로 열린 올스타전에서 59,057명의 팬 앞에서 4대 1 승리를 거두었고, 로저스는 승리 투수가 되었다.[61] 야구 역사가이자 작가인 조나 케리(Jonah Keri)는 그의 저서 ''Up, Up and Away''에서 "당시 경기장에 있던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몬트리올의 야구는 그날 밤 빅 O에서 절정에 달했다"고 썼다.[62]

엑스포스는 1982년 NL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 ''베이스볼 다이제스트(Baseball Digest)'', ''스포팅 뉴스(The Sporting News)'' 등 여러 매체에서 몬트리올을 지지했다.[63] 그러나 팀은 86승으로 리그 3위에 그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57] 엑스포스는 1983년 패닝 감독을 빌 버던(Bill Virdon)으로 교체했고, 새 감독 아래 7월 중순까지 리그 선두를 달렸다.[64] 그러나 시즌 후반부에 부진하며 82승 80패로 시즌을 마쳤다.[57] 엑스포스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NL 동부 지구에서 다른 어떤 팀보다 더 많은 경기를 이겼지만, 포스트시즌 진출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65]

팀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엑스포스는 1984년 안타 수 부문 역대 2위인 타이 콥(Ty Cobb)에 이어 2위를 기록 중이던 42세 베테랑 피트 로즈(Pete Rose)와 1년 계약을 맺었다.[66] 로즈는 4월 13일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5대 1 승리 속에 통산 4,000안타를 기록했다.[67] 선수와 구단 경영진은 로즈 영입이 리그 우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몬트리올에서 95경기 동안 타율 .259, 무홈런으로 부진했고, 결국 원 소속팀인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되었다.[68] 몬트리올은 시즌을 패배 기록으로 마감했다.[57]

몬트리올의 1984년 시즌 실패는 야구계 전반의 연봉 상승과 맞물려 관중 수가 31%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다.[69] 결국 엑스포스는 시즌 후 대규모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1984년 12월 10일 게리 카터를 뉴욕 메츠로 보내고 4명의 선수를 받았다.[70] 카터는 러스티 스타브 이전에 프랑스어를 배우고 팀에서 가장 소통하기 쉬운 선수 중 한 명이 되어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팀의 상징적인 선수였다.[69] 이 트레이드는 브론프만이 1981년 카터가 체결한 7년 1260만달러 계약을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고 언급한 지 1년 만에 이루어졌다.[71]

메이저리그 야구의 경제적 요인은 1986년 시즌 후 안드레 도슨의 이탈로 이어졌다. 그 오프시즌 동안 MLB 구단주들은 커미셔너 피터 우버로스(Peter Ueberroth)의 지시에 따라 자유 계약 선수들의 연봉을 낮추기 위해 메이저리그 야구 담합(Major League Baseball collusion)했다. 그 해 가장 가치 있는 자유 계약 선수(free agent) 중 한 명이었어야 할 도슨은 그를 영입하려는 팀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엑스포스가 그의 무릎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관심을 더욱 낮추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72] 이러한 행동에 분노한 도슨은 시카고 컵스의 훈련 캠프에 서명되지 않은 공백 계약서를 가지고 나타났다. 컵스는 도슨과 1년 50만달러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그의 이전 연봉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73][74] 도슨은 1987년 49홈런 137타점을 기록하며 NL MVP를 수상했다.[75]

팀 레인스 또한 담합의 영향을 받았다. 1986년 수입액인 150만달러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제시받지 못한 레인스는 3년 500만달러 계약으로 엑스포스에 복귀했다.[75] 그는 1987년 139경기에서 123득점으로 NL 득점 1위를 기록했고, 50도루, 타율 .330, 18홈런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보냈다.[76] 그는 또한 1987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에서 13회말 3루타로 결승 2득점을 기록하며 MVP로 선정되었다.[77] 레인스는 결국 1990년 시카고 화이트삭스(Chicago White Sox)로 트레이드되었다.[78]

2. 5. El Presidente, El Perfecto! (1989-1993)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승률이 5할을 조금 넘는 팀이었지만, 선수 육성 시스템을 재건하고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힘썼다.[79] 그러나 몬트리올에서 자유 계약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80] 구단주 브론프만은 야구 사업과 올림픽 스타디움에 팀을 유치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 낙담하고 있었다.[81]

1989년, 엑스포스는 지구 우승을 위해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선발 투수 마크 랭스턴(Mark Langston)을 영입했지만, 미래의 명예의 전당 멤버인 랜디 존슨(Randy Johnson) 등 유망주들을 내주는 대가를 치렀다.[81][82] 엑스포스는 8월까지 1위 자리를 유지했지만 결국 81승 81패로 지구 4위를 기록했고, 랭스턴은 자유 계약 선수로 팀을 떠났다.[83][84][85]

브론프만은 다른 구단주들의 무분별한 지출, 선수들과의 갈등 증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 점점 불안감을 느껴 팀을 매각하려 했지만, 몬트리올 지역 사업가들의 인수 의향이 없어 무산되었다.[81][86] 대신 클로드 브로슈(Claude Brochu)가 그룹을 이끌어 1억 달러에 팀을 인수했고, 퀘벡 주와 몬트리올 시 정부가 3,300만 달러를 지원했다.[90] 벨 캐나다(Bell Canada), 데자르댕 그룹(Desjardins Group), 장 쿠투 그룹(Jean Coutu Group), 로블로 컴퍼니즈(Loblaw Companies)와 같은 캐나다 기업과 사업가들이 소수 지분을 매입하여 1990년 11월 29일에 매각이 완료되었다.[91]

새 구단주 체제에서 엑스포스는 팀 레이니스(Tim Raines)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했다.[93] 1991년 시즌 중에는 20승 29패의 성적 부진을 이유로 벅 로저스(Buck Rodgers) 감독을 해임하고 톰 러넬스(Tom Runnells)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94][95]

1991년 7월 26일, 마크 가드너(Mark Gardner)는 LA 다저스를 상대로 9이닝 노히트를 기록했지만 10회에 패했다.[96] 이틀 후, 데니스 마르티네즈(Dennis Martínez)는 같은 팀을 상대로 메이저 리그 역사상 13번째 완봉승을 달성하며 2-0으로 승리했다.[97] 그의 포수 론 해시(Ron Hassey)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의 완봉승을 기록한 포수가 되었다.[99] 경기 후 데이브 밴 호른의 "엘 프레시덴테, 엘 퍼펙토!(El Presidente, El Perfecto!)"라는 외침은 엑스포스 역사에 남게 되었다.[98]

그러나 1991년 9월 13일, 모토크로스(motocross) 행사 몇 시간 전 올림픽 스타디움 구조물에서 50톤짜리 보가 무너져 9미터 아래 공공 통로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엑스포스는 시즌 마지막 한 달 동안 홈 경기를 치를 수 없게 되었다.[100] 결국 엑스포스는 1991년 71승 90패, 승률 .444로 내셔널 리그(NL) 동부 리그 6위를 기록했고, 1976년 이후 처음으로 100만 명 미만의 관중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했다.[101]

래리 워커(Larry Walker), 마퀴스 그리섬(Marquis Grissom), 델리노 디쉴즈(Delino DeShields) 등이 1990년 시즌에 데뷔했고,[102] 1990년 8월에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모이세스 아루(Moisés Alou)를 영입했다.[103] 1992년에는 모이세스 아루의 아버지인 펠리페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메이저 리그 최초의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감독이 되었다.[104] 1993년, 디쉴즈는 페드로 마르티네즈(Pedro Martínez)와 트레이드되었는데, 이 거래는 처음에는 비용 절감을 위한 조치로 비난을 받았다.[82][10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포스는 경기장에서 성적이 향상되었고, 1992년 87승, 1993년 94승을 거두며 두 시즌 모두 NL 동부 리그 2위를 기록했다.[101]

2. 6. 1994년 선수 파업과 그 이후

1994영어 시즌을 앞두고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강력한 팀으로 평가받았지만, 3년 연속 서부 지구 우승을 차지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동부 지구로 이동하면서 지구 우승에 대한 기대는 다소 꺾였다.[107] 애틀랜타는 시즌 초반 14경기에서 13승을 거두며 몬트리올에 8.5경기 차로 앞서 나갔다.[108] 6월 말, 엑스포스는 브레이브스에 2.5경기 차로 뒤지고 있었다. 몬트리올은 이 시리즈에서 3경기 중 2경기를 승리했는데, 특히 개막전에서 미래의 명예의 전당 멤버인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거둔 짜릿한 역전승은 선수들에게 시즌의 전환점으로 여겨졌다.[109] 이후 몬트리올은 서부 해안 원정 경기에서 마지막 5경기를 승리하며 올스타 브레이크를 1위로 맞이했다.[110] 엑스포스는 브레이크 이후에도 상승세를 이어갔는데, 7월 18일부터 8월 11일까지 20승 3패를 기록했다.[106] 팀 역사상 두 번째로 모이세스 알루, 윌 코르데로, 대린 플레처, 마퀴스 그리솜, 켄 힐 등 5명의 선수가 올스타에 선정되었다.[111]

마퀴스 그리솜, 모이세스 알루, 래리 워커, 윌 코르데로가 이끄는 타선은 경기당 5점 이상을 뽑아냈다. 버치 헨리, 켄 힐, 제프 파세로, 그리고 젊은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버틴 투수진은 내셔널리그 최고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74승 40패, 106승 페이스로 순항했다. 엑스포스는 8월 12일 아침까지 메이저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했지만, MLB 선수들의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되었다.[112]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팀 간 수익 배분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시즌은 단체 협약 없이 시작되었다. 많은 팀들은 메이저리그 선수 협회(MLBPA)가 강력히 반대하는 연봉 상한제가 도입되지 않는 한 수익 배분에 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합의에 실패하자 구단주들은 일방적으로 그들의 시스템을 시행하려 했고, 선수들은 이에 반발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적어도 노동절(미국에서는 노동절과 같은 날)까지는 경기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113] 한 달간의 협상 결렬 끝에 9월 14일, 결국 시즌 잔여 경기가 취소되었다.[114] 엑스포스는 이후 다시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구단주였던 클로드 브로슈의 입장에서 연봉 상한제는 엑스포스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협상된 상한선의 최대치를 지불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개월 후 미국 연방 판사 소니아 소토마요르의 명령으로 파업이 종료되었을 때, 강력한 수익 배분 제도가 시행되지 못한 것은 엑스포스에게 큰 타격이었다.[115] 엑스포스는 이미 구두쇠 구단으로 악명이 높았다(래리 워커는 언론에 팀이 선수들에게 비타민을 직접 사라고 요구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116] 1994영어년 엑스포스는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째로 낮은 연봉 총액을 기록했다.[117] 파업 이후, 엑스포스는 핵심 선수들을 팔기 시작했다. 켄 힐, 존 웨털랜드, 마퀴스 그리솜이 트레이드되었고, 래리 워커는 자유 계약 선수로 팀을 떠났다. 모이세스 알루, 페드로 마르티네스, 멜 로하스도 결국 팀을 떠났다.[118] 브로슈는 자신의 저서 "My Turn At Bat"에서 선수 매각이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단주 파트너들이 팀의 손실을 감당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브로슈는 1994영어년의 전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1995영어년에 2500만달러의 손실을 보았을 것이고, 이는 팀을 파산 직전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는 파트너들이 몬트리올에 팀을 잔류시킬 자금을 지원했다면 힐, 웨털랜드, 그리솜, 워커를 모두 잡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19] 브로슈가 단장 케빈 말론에게 힐, 웨털랜드, 그리솜, 워커를 모두 내보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말론은 적어도 한 명은 남겨두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브로슈는 말론에게 연봉 조정 마감일까지 그들을 모두 명단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엑스포스는 트레이드 협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고, 결국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120]

2. 7. 쇠퇴 (1995-2000)

1994년 선수노조 파업과 그에 따른 유망주 강제 매각으로 몬트리올 팬들은 분노했다.[121] 1995년 엑스포스는 내셔널 리그 동부지구 최하위를 기록했고, 평균 관중 수는 24,543명에서 18,189명으로 약 26% 감소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엑스포스에 대한 관심은 계속 줄어들었고, 몬트리올 연고 기간 동안 단 한 시즌도 평균 2만 명 이상의 관중을 기록하지 못했다.[122] 조나 케리(Jonah Keri)는 엑스포스 팬들이 구단주 클로드 브로슈가 팀에 더 투자하도록 설득하지 못한 것을 비판했다고 언급했다.[123] 한편, 언론에서는 엑스포스를 유망주를 키워 다른 구단으로 보내는 트리플A 팀에 비유하기 시작했다.[124]

관중 수는 급감했지만, 브로슈는 1995년에 엑스포스가 소액의 이익을 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업 이후 다른 구단들은 티켓 판매가 증가한 반면, 몬트리올 팬들의 기반은 계속 약화되었다.[125] 최고 선수들을 대부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엑스포스는 1996년 내셔널 리그 동부지구에서 88승 74패로 2위를 차지하며 경쟁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후 5시즌 동안은 부진을 면치 못하며 매년 패배를 기록했고, 지구 순위에서도 4위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101]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997년 18승 7패, 평균자책점(ERA) 1.90을 기록하며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선수 최초이자 엑스포스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126] 그러나 그는 사이 영 상 수상자로 발표된 지 일주일 만에 연봉 삭감의 일환으로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127]

19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엑스포스에 대한 관심은 쇠퇴하여 몬트리올 스포츠계에서 거의 사라졌다. 펠리페 알루는 1990년대 후반에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팀을 소유한 사람이 몬트리올을 방문했는데, 시내 어느 상점에서도 엑스포스 모자를 찾을 수 없었고, 일주일 동안의 체류 기간 동안 엑스포스 모자를 쓴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올림픽 스타디움 경기를 보러 택시를 탔을 때, 기사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고, 경기를 알리는 표지판도 어디에도 없었다. 알루의 친구는 이러한 부진한 마케팅으로 엑스포스가 팬들을 끌어들이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128] 케리는 엑스포스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팀을 이끌 자원과 인내심을 가진 더 잘 자금이 지원되는 "챔피언"이 팀을 인수했다면 이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129]

브로슈는 엑스포스를 몬트리올에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해결책은 올림픽 스타디움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파트너들을 설득하려 했다. 팬들은 올림픽 스타디움이 넓고 안전하지 않다고 인식했고, FA 선수들은 열악한 경기장 상태 때문에 엑스포스에서 뛰고 싶어하지 않았다.[130] 1997년, 라바트 파크(Labatt Park)로 명명될 3만 5천석 규모의 시내 시설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는데, 예산은 2.5억캐나다 달러였고 예상 개장일은 2001년이었다. 이 경기장은 역사적인 보나벤처 역을 연상시키는 복고풍 클래식 경기장이었을 것이다. 브로슈는 주 정부로부터 1.5억캐나다 달러의 자금을 요청했지만, 뤼시앵 부샤르(Lucien Bouchard) 주총리는 주 정부가 병원을 폐쇄해야 하는 상황이고 올림픽 스타디움 부채도 아직 상환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공 자금을 경기장에 지원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131] 컨소시엄 회원 상당수는 대신 팀을 매각하는 것을 선호했다.[132] 매각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 회원들은 브로슈와 그의 파트너들 사이의 내분을 공개하기 위해 익명의 제보를 프랑스 언론에 흘리기 시작했다.[133] 관중 수는 계속 감소하여 1998년에는 평균 11,295명으로 39% 감소했다.[134] 이는 몬트리올이 100만 명 미만의 팬을 끌어들인 5시즌 연속 첫 번째 시즌이었다.[101]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밝은 점 중 하나는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스타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 연속 올스타 게임에 엑스포스의 유일한 대표 선수로 참가했다. 게레로는 결국 201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99년, 파트너들은 공개적으로 브로슈의 조직 운영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그는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135] 브로슈는 또한 MLB 커미셔너 버드 셀리그(Bud Selig)와 엑스포스를 워싱턴 D.C.로 이전하기 위한 비밀 거래를 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파트너들의 비난에 답하기 위해 열린 봄철 기자 회견에서 이를 부인했다.[136] 브로슈의 반박은 효과가 없었고 팬들은 브로슈에 대한 컨소시엄의 중상모략에 동조했다.[137] 그는 결국 미국 미술품 거래상 제프리 로리아(Jeffrey Loria)에게 운영 책임자 자리를 내주었는데, 로리아는 처음에는 프랜차이즈의 구세주로 칭송받았다.[138] 로리아는 1991년에 팀 인수를 입찰했지만, 브로슈와 메나르(Ménard)는 그의 지배권 요구에 반대했다.[139]

2. 8. 축소 시도와 연고지 이전 (2001-2004)

엑스포스는 642,748명의 팬만을 불러들였는데, 이는 수십 년 만에 MLB에서 가장 적은 수치 중 하나였다.[101][152] 로리아의 소수 지분 파트너들은 그가 자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계획적으로 행동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셀리그와 MLB 관계자들에게 호소했지만 무시당했고, 셀리그와 로리아가 공모하여 엑스포스를 몬트리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고 믿었다.[153] MLB는 리그 축소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고, 엑스포스와 미네소타 트윈스가 제외될 예정이었다.[154] 2001년 11월 6일, MLB 구단주들은 28대 2로 축소에 찬성표를 던졌고, 엑스포스와 트윈스만 반대했다.[155]

초기 계획은 엑스포스와 트윈스가 명목상의 시즌을 치르고 해체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네소타에서 제기된 소송으로 인해 MLB는 메트로돔과의 트윈스 임대 계약을 이행해야 했고, MLBPA의 이의 제기로 인해 두 팀 모두 구제되었다.[156] MLB가 제외할 다른 구단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정을 유지하기 위해 짝수의 팀을 유지해야 했으므로 엑스포스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은 줄어들었다.[157]

그 직후 로리아는 엑스포스를 MLB에 매각하고 그 판매 대금을 사용하여 존 헨리로부터 플로리다 말린스를 구입했다.[144] MLB는 그에게 1.2억달러에 엑스포스를 사들였고 말린스 인수를 완료하기 위해 무이자 대출 3850만달러를 제공했다.[155] 매각 후 로리아는 엑스포스의 컴퓨터와 스카우팅 보고서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귀중한 것을 마이애미로 가져갔다.[158]

MLB는 다른 29개 구단의 파트너십인 엑스포스 베이스볼 L.P.를 설립하여 팀을 운영했다. MLB는 전 애너하임 에인절스 사장 토니 타바레스(Tony Tavares)를 팀 사장으로 임명하여 사업 운영 및 팀의 향후 이전을 감독하게 했고,[160][161] 메츠의 부단장 오마르 미나야(Omar Minaya)를 부사장 겸 단장 겸 프랜차이즈 운영 책임자로 임명했다.[160] MLB의 수석 징계 위원 프랭크 로빈슨(Frank Robinson)이 팀의 매니저로 임명되었다.

야구 역사상 최초의 라틴계 단장인 미나야는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 그는 스프링 트레이닝 시작 72시간 전에 고용되었고, 야구 운영 부서에는 다른 직원 6명만 있었다. 다른 직원 대부분은 로리아를 따라 말린스로 갔거나 다른 구단에 취직했다.[162]

엑스포스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시즌이라고 생각했던 2002년 시즌을 시작했고, 올림픽 스타디움의 홈 개막전(말린스와의 승리)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몬트리올의 홈 개막전에는 34,000명의 팬이 찾았는데, 그중 많은 사람들이 프랜차이즈에 "작별"을 고하고 로리아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온 것이다.[163]

엑스포스의 지분을 76%에서 7% 미만으로 잃은 로리아의 소수 지분 파트너들은 메이저 리그 야구, 셀리그, 로리아를 상대로 폭력단 조직법(RICO) 소송을 제기했다. 파트너들은 로리아와 사무국장이 현금 투자를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분을 박탈하려고 공모했고, 따라서 몬트리올에서 프랜차이즈의 미래를 고의적으로 훼손했다고 주장했다.[164] 파트너들은 궁극적으로 중재 패널이 그들의 주장을 기각한 후 2005년 소송이 기각되면서 소송에서 패소했다.[165]

경기장에서는 2002년 엑스포스가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시즌 대부분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엑스포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마지막 시도를 위해 연봉을 인상할 유연성이 없었다.[166] 미나야는 6월 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블록버스터급 트레이드를 성사시켜 바르톨로 콜론(Bartolo Colón)을 영입했지만, 팀은 초반의 상승세를 잃었다. 엑스포스는 83승 79패의 기록으로 1996년 이후 첫 승률 5할 이상 시즌을 기록했지만, NL 동부에서 2위를 차지했고, 디비전 선두와 와일드 카드 모두 19경기 차이였다.[167]

엑스포스 프랜차이즈는 구단주와 선수 간의 새로운 단체 교섭 협약으로 구제되었는데, 이 협약은 적어도 2006년까지 축소를 금지했다. 축소에 대한 추측은 이전에 대한 소문으로 대체되었다.[168][169] MLB는 엑스포스를 즉시 이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팀이 81경기 중 22경기를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치르도록 하여 수익을 증가시키려고 했다.[170]

엑스포스는 다시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경쟁을 벌였다. 8월 29일, 팀은 내셔널리그 와일드 카드 자리를 놓고 다른 4개 팀과 동률을 이루었다.[171] 9월 1일 MLB의 로스터가 확장되자, 셀리그는 엑스포스가 마이너 리그에서 추가 선수를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른 구단주들은 팀의 3500만달러 연봉에서 아주 적은 비율인 수천 달러를 더 지출하여 팀을 강화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172] 팀은 다시 부진하며 동부에서 1위와 18경기 차, 와일드 카드 자리와 8경기 차로 시즌을 마쳤다.[173]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마지막 시즌은 이었고, 다시 몬트리올과 산후안에서 나뉘어 치러졌다.[173] 팀은 4월 5승 19패의 성적으로 회복하지 못했고, 67승 95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는데, 이는 내셔널리그에서 두 번째로 나쁜 성적이었다. 2004년 9월 29일, 메이저 리그 야구는 프랜차이즈가 시즌에 워싱턴 D.C.로 이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 같은 날 밤, 팀은 몬트리올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플로리다 말린스에게 9대 1로 패했고, 관중은 31,395명이었다.[175] 팀은 엑스포스로서 마지막 경기를 원정에서 치렀고, 1969년 프랜차이즈의 첫 경기에서 상대한 팀인 뉴욕 메츠와의 경기로 10월 3일에 끝났다.[176] 엑스포스의 마지막 경기에서 뉴욕 메츠셰이 스타디움에서 몬트리올을 8대 1로 이겼다. 제이미 캐롤(Jamey Carroll)이 엑스포스의 마지막 득점을 기록했고, 엔디 차베스(Endy Chávez)가 9회초에 병살타를 치면서 엑스포스의 마지막 타자가 되었다. 팀은 36년간의 역사를 2,753승 2,943패 4무의 기록으로 마감했다.[176]

3. 팀 정체성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팀 정체성은 다음과 같다.

엑스포스 로고는 "Expos Baseball"을 의미하는 "eb" 문자를 디자인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몬트리올"을 나타내는 큰 "M"을 형성한다.[178]

1972년, 텔레미디어 라디오 네트워크는 자크 두세와 클로드 레이몽을 엑스포스의 프랑스어 방송팀으로 영입했다. 칼링 오키프 양조장은 이들에게 야구 용어의 프랑스어 용어집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이전에는 프랑스어 방송인들이 프랑스어 번역이 없는 야구 개념에 대해 영어를 사용했으나, 이들의 노력으로 프랑스어 야구 어휘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홈런"은 coup de circuit프랑스어, "안타"는 coup sûr프랑스어, 너클볼은 balle papillon프랑스어(직역하면 "나비 공")이 되었다.[179]

3. 1. 로고와 유니폼

엑스포스 로고는 "Expos Baseball"을 의미하는 스타일리쉬한 문자 "eb"로 구성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로고는 "몬트리올"을 나타내는 큰 "M"을 형성한다.[178]

1972년, 텔레미디어 라디오 네트워크는 엑스포스의 프랑스어 방송팀으로 자크 두세와 클로드 레이몽을 영입했다. 그들은 프랑스어 방송의 타이틀 스폰서였던 칼링 오키프 양조장으로부터 야구 용어의 프랑스어 용어집을 만들 것을 요청받았다. 이전, 특히 몬트리올 로열스 시절에는 프랑스어 방송인들이 프랑스어로 번역이 없는 야구 개념에 대해 영어를 사용했다. 그들의 노력을 통해 프랑스어 야구 어휘가 만들어졌다. "홈런"은 coup de circuit프랑스어이 되었고, "안타"는 coup sûr프랑스어이 되었다. 너클볼은 balle papillon프랑스어(직역하면 "나비 공")이 되었다.[179]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초기 유니폼은 왼쪽 가슴에 소문자 "expos"라는 단어 위에 팀 로고가 있었고, 오른쪽 가슴에는 둥근 세리프체의 파란색 번호가 있었다. 홈 유니폼은 흰색을, 원정 유니폼은 파우더 블루(연한 파란색)를 기본 색상으로 사용했다. 두 디자인 모두 흰색 크라운, 파란색 챙과 뒷면, 그리고 빨간색 측면 패널이 있는 삼색 모자와 함께 착용되었으며, 앞면에는 엑스포스 로고가 있었다. 초기 디자인은 수년에 걸쳐 몇 가지 사소한 변경 사항(예: 원정 유니폼의 글씨 색상을 빨간색으로 변경, 어깨와 옆면에 줄무늬 추가)을 거쳤다.[180]

1992년, 엑스포스는 유니폼 디자인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홈 유니폼에는 파란색 줄무늬가 추가되었고, 앞면에는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파란색 스크립트체 "Expos"가 새겨졌다. 원정 유니폼은 회색을 기본 색상으로 사용했고, 빨간색 스크립트체로 "Montreal"이 파란색과 흰색 테두리와 함께 새겨졌다. 원정 유니폼 스크립트 위에는 파란색 플뢰르드리도 추가되었다. 두 디자인 모두 왼쪽 소매에 팀 로고와 스크립트 아래에 왼쪽 가슴 번호가 있었고, 앞면에 엑스포스 로고가 있는 전부 파란색 모자와 함께 착용되었다.[180]

3. 2. Youppi!

밝은 주황색 털복숭이 마스코트 유피!가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 안에서 팬과 교류하고 있다.
경기 전 유피!


엑스포스는 1978년 시즌에 첫 번째 마스코트인 "수키"를 선보였다. 수키는 미래적인 유니폼을 입은 미스터 멧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극심한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한 시즌 만에 은퇴했다. 수키는 한때 이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공격받기도 했다.[181] 엑스포스는 대체 마스코트를 찾던 중 파산한 미국 마스코트 회사의 재고에서 필리 팬매틱과 비슷한 디자인의 마스코트를 발견했다.[182] 이 마스코트는 팬매틱과 머펫 쇼의 여러 캐릭터(예: 미스 피기)를 만든 보니 에릭슨이 디자인했다.[181] 팀은 새로운 마스코트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만세!"를 뜻하는 "유피!"로 지었다.[181] 수키와 달리 유피!는 1979년 첫선을 보인 순간부터, 특히 아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25년간 엑스포스 마스코트로 활동하며 어린이 병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182]

유피!는 1989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경기에서 퇴장당하며 역사를 만들었다.[183] 이 사건은 로스앤젤레스와의 경기 11회말에 유피가 다저스 더그아웃 위에서 춤을 추고 퍼레이드를 하던 중 발생했다. LA의 감독인 토미 라소다가 심판에게 항의했고 심판은 마스코트에게 경기장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181] 결국 유피!는 다저스 더그아웃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경기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경기는 로스앤젤레스가 22이닝 접전 끝에 1대 0으로 승리하며 엑스포스 역사상 가장 긴 경기가 되었다.[184]

엑스포스가 워싱턴으로 이전하면서 유피!는 불확실한 상황에 놓였다. 다른 몬트리올 스포츠 팀을 포함한 여러 단체가 유피!를 인수하려는 의사를 표명했다. 1년간 보관된 후, 마스코트는 내셔널 하키 리그의 몬트리올 캐나디언스에 매각되었다. 캐나디언스는 유피!가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리그를 바꾼 마스코트라고 주장하며, 그는 2005년 10월 18일 캐나디언스에서 재데뷔했다.[185]

4.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관계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1977년 아메리칸 리그에 합류했고, 이듬해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첫 연습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는 매년 열리는 피어슨컵(Pearson Cup) 시리즈의 시작이었다.[186] 1978년부터 1986년까지(1981년 제외) 매년 열린 8번의 연습 경기에서 각 팀은 3승을 거두었고, 2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188] 1997년 인터리그가 도입되면서 두 팀 간의 첫 정규 시즌 경기가 열렸고, 몬트리올토론토 양쪽에서 관중이 증가했다.[189][190]

팬이
2015년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블루제이스-레즈 연습 경기 중 엑스포스의 복귀를 요구하는 팬


당시 엑스포스 사장 존 맥헤일은 토론토에 두 번째 캐나다 메이저리그 팀을 추가하는 것을 지지했다.[191] 1985년 블루제이스가 첫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면서 엑스포스의 인기는 주춤했다.[192] 블루제이스는 엑스포스가 온타리오 남부 여러 시장에서 경기를 방송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MLB에 온타리오 남부를 독점 홈 텔레비전 지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엑스포스는 퀘벡과 대서양 캐나다에서만 완전한 방송권을 가졌다.[193] 온타리오 남부 시청률 감소는 엑스포스의 스폰서 유치 능력을 저해했다. 데이브 반 호른은 기업 지원 감소가 팀의 "오랜 하락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195]

블루제이스가 1992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찰스 브론프만에게 캐나다에서 열린 첫 월드시리즈 경기의 시구를 맡겼다.[196] 그러나 블루제이스 사장 폴 고드프리는 2001년 엑스포스 축소와 2004년 이전을 지지했다.[197] 많은 엑스포스 팬들은 블루제이스가 캐나다 팀을 지지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198]

엑스포스가 워싱턴으로 이전한 지 10년 후인 2014년,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블루제이스와 뉴욕 메츠 간의 연습 경기가 열렸다. 이 시리즈는 몬트리올의 메이저리그 복귀 의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200] 워렌 크로마티가 이끄는 몬트리올 야구 프로젝트가 조직자 중 하나였다.[201] 96,350명의 팬들이 참석하여 "Let's go Expos!"와 "We want baseball!"을 외쳤다.[200] 블루제이스는 2015년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 96,545명의 팬들을, 2016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 10만 6천 명 이상의 팬들을 불러 모았다.[202][205] 2014년 이후 블루제이스는 매 시즌 시작 전 몬트리올에서 2경기의 춘계 훈련 경기를 개최하고 있다.[205] 2018년, 엑스포스에서 활약했던 아버지 블라디미르 게레로를 둔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는 연습 경기에서 결승 홈런을 쳐 몬트리올 관중을 열광시켰다.[206]

5. 선수

블라디미르 게레로,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같은 선수들이 엑스포스에서 뛰었다.[217] 엑스포스에는 김선우 선수도 있었는데,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1번을 달고 투수로 활약했다.

5. 1. 주요 선수

5. 2. 역대 한국인 선수


  • 김선우 - 31번, 투수, 2002년~2004년

5. 3. 영구 결번

게리
카터

포수
1974–84 & 1992

안드레
도슨

우익수/중견수
1976–86

러스티
스타브

우익수
1969–71 & 1979


레인스

좌익수
1979–90 & 2001

재키
로빈슨

2루수
1997년 영구결번


5. 4. 명예의 전당 헌액자

게리
카터

포수
1974–84 & 1992
앤드레
도슨

우익수/중견수
1976–86
러스티
스타브

우익수
1969–71 & 1979

레인스

좌익수
1979–90 & 2001
재키
로빈슨

2루수
1997년 영구결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몬트리올 엑스포스 선수는 총 10명이다. 게리 카터는 2003년에 헌액되었으며, 명예의 전당 기념패에 엑스포스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된 최초의 선수이다. 카터는 뉴욕 메츠 소속으로 1986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 측에서는 그가 메츠 소속으로 기념되기를 원한다는 초기 발언을 했지만, 결국 엑스포스 모자를 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카터는 "몬트리올에서 11년 동안 뛰었고, 대부분의 기록과 업적을 그곳에서 달성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라며 이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210]

앤드레 도슨은 2010년 헌액되어 엑스포스 선수로 묘사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는 선수 생활 21년 중 대부분을 몬트리올에서 보냈지만, 시카고 컵스 선수로 헌액되지 못한 것에 대해 "다소 가슴 아픈 일"이라며 실망감을 표현했다.[211] 도슨이 엑스포스 선수 헌액을 꺼린 이유는 1986~87년 MLB 담합 사건 당시 팀과의 관계 악화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팀이 자신을 몬트리올에서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이 자신을 자유 계약 선수로 영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했다.[212]

명예의 전당 기념패에 엑스포스 로고가 새겨진 세 번째 선수는 2017년 마지막 자격 연도에 헌액된 팀 레인스이다.[213]

2018년 1월 24일,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발표되었다. 게레로는 16시즌 중 8시즌을 엑스포스에서 보냈고, 엑스포스 소속으로 세 번의 MLB 올스타 게임 출전과 세 번의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했다. 그의 통산 안타 2,590개 중 거의 절반(1,215개)이 몬트리올에서 기록되었으며, 홈런 449개 중 234개, 타점 1,496개 중 702개를 엑스포스에서 기록했다. 게레로는 자신의 명예의 전당 기념패에 에인절스 모자를 쓴 모습이 담길 것이라고 발표했다.[214]

다른 5명의 헌액자들은 몬트리올에서의 활동이 선수 경력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딕 윌리엄스 감독은 21년 감독 생활 중 3개의 다른 팀을 월드 시리즈로 이끈 경력의 일부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엑스포스 소속이었다.[215] 토니 페레스는 엑스포스에서 3년간 활동했지만, 주로 1970년대 신시내티 "빅 레드 머신" 팀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216]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1994~97)와 랜디 존슨(1988~89)은 모두 선수 경력 초기에 몬트리올에서 뛰었지만, 선수 생활 대부분을 다른 곳에서 보냈으며 2015년에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17] 프랭크 로빈슨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팀을 감독했지만(프랜차이즈가 워싱턴으로 이전하는 기간 포함), 선수 시절 업적을 바탕으로 헌액되었다. 그는 AL과 NL 모두에서 MVP를 수상한 최초의 선수이며, 1966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고, 신인 기록인 38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NL 신인왕을 수상했다.[218]

워싱턴 내셔널스는 2010년 내셔널스 파크에서 "명예의 반지"를 공개하며 몬트리올에서 시작된 팀의 역사를 기념했다. 이 반지는 워싱턴 D.C. 야구 또는 몬트리올-워싱턴 프랜차이즈와 관련된 명예의 전당 선수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후 워싱턴 D.C.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게리 카터와 앤드레 도슨 등 두 명의 엑스포스 선수가 초대 멤버로 선정되었다.[219] 프랭크 로빈슨은 2015년에,[220] 팀 레인스는 2017년에 명예의 반지에 이름을 올렸다.[221]

몬트리올 엑스포스 구단은 1993년 창단 25주년을 기념하여 몬트리올 엑스포스 명예의 전당을 설립했다. 초대 헌액자는 찰스 브론프만이었다. 1993년 8월 14일 경기 전 행사에서 우익수 벽에 브론프만의 이름과 스프링 캠프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83, "FONDATEUR / FOUNDER"(창립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원형 패치가 공개되었다.[223] 총 23명이 구단으로부터 명예의 전당 헌액의 영광을 안았다.[224]

범례
굵은 글씨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scope="row" style="background:#ffb;"|엑스포스 선수로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굵은 글씨명예의 전당 포드 C. 프릭상 수상자



몬트리올 엑스포스 명예의 전당
번호헌액자포지션활동 기간헌액 연도
찰스 브론프만구단주1969–19901993
8게리 카터포수(C)1974–1984, 19921993
10러스티 스타브우익수(RF)1969–1971, 19791993
4진 모치감독1969–19751994
16클로드 레이먼드투수(P)1969–19711994
45스티브 로저스투수(P)1973–19851994
35우디 프라이먼투수(P)1975–1976, 1978-19831995
장-피에르 로이해설자1969–19841995
26빌 스토니먼투수(P)1969–19731995
49워렌 크로마티외야수(OF)/1루수(1B)1974–19831996
33론 헌트2루수(2B)1971–19741996
15, 50래리 패리시3루수(3B)/우익수(RF)1974–19811996
10앤드레 도슨우익수(RF)/중견수(CF)1976–19861997
34빌 굴릭슨투수(P)1979–19851997
31, 41제프 리어던투수(P)1981–19861997
존 맥헤일사장
단장(GM)
1969–1986
1978–1984
1997
44, 54팀 버크투수(P)1985–19911998
4크리스 스파이어유격수(SS)1977–19841998
29, 58팀 월러치3루수(3B)1980–19921998
6, 7짐 패닝단장(GM)
감독
1969–1976
1981–1982, 1984
2000
30팀 레인스좌익수(LF)1979–1990, 20012000
데이브 반 호른해설자1969–20002001
자크 두세해설자1972–20042003


5. 5. 기타

오랫동안 방송을 해 온 데이브 밴 혼(Dave Van Horne)은 2011년 포드 C. 프릭 상(Ford C. Frick Award) 수상자로 선정되었다.[222] 이 상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서 야구에 "중대한 공헌"을 한 방송인에게 수여한다.

6. 팀 기록

여기에 나열된 선수들은 몬트리올 시대 프랜차이즈 통계 선두 주자들이다. 프랜차이즈 전체 기록 보유자 목록은 워싱턴 내셔널스 팀 기록 목록을 참조하면 된다.

타격기록선수합계참조
출전 경기수팀 월러치1,767[225]
안타팀 월러치1,694[225]
홈런블라디미르 게레로234[225]
타점팀 월러치905[225]
도루팀 레인즈635[225]
타율블라디미르 게레로.323[226]



투구기록선수합계참조
경기 수팀 버크525[227]
승리스티브 로저스158[227]
세이브제프 리어던152[227]
탈삼진스티브 로저스1,621[227]
완투승스티브 로저스129[227]
평균자책점
(500이닝 이상)
팀 버크2.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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